< 영화 소개>
🎬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The Devil All the Time)
- 장르: 범죄, 드라마, 스릴러
- 국가: 미국
- 감독: 안토니오 캄포스 (Antonio Campos)
- 주연: 톰 홀랜드, 빌 스카스가드, 로버트 패틴슨, 세바스찬 스탠, 엘리자 스캔런
- 제작사: 넷플릭스, Borderline Films
- 개봉일: 2020년 9월 16일 (넷플릭스 공개)
- 시간: 138분
-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R등급)
- 시청: 넷플릭스 스트리밍 가능
줄거리
어떤 이야기들은 시작부터 무겁다. 말끝마다 흙먼지가 묻어나고, 기도문엔 울음 대신 피가 흐른다. 윌러드는 전장에서 돌아온 남자였다.
눈앞에서 죽어간 전우, 뼈만 남은 믿음. 그는 신을 붙들었고, 그 믿음은 끝내 사랑하는 이를 잃게 만들었다. 아내가 병에 걸렸을 때, 그는 모든 걸 바쳤다. 기도를 올리고, 피를 흘렸다. 하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들 아빈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무릎 위에서 배운 건 ‘믿음’이 아니라 ‘폭력으로 포장된 절망’이었다. 시간은 흘러 아빈은 청년이 되었다. 그가 세상과 부딪히는 방식은 서툴고, 거칠고, 가끔은 너무 정확했다. 타락한 목사, 병든 광신,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죄들. 그 모든 것 앞에서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나씩, 천천히, 묵묵히… 손에 피를 묻히며 ‘정의’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가 남긴 세계와 싸웠다. 그가 구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음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사라지지 않는 악에 대하여
1)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람들이 기도하던 그 순간, 누군가는 칼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신앙의 이름 아래 자행되는 폭력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신의 뜻’을 입에 담으며 누군가를 처벌했고, 또 누군가를 구속했다. 기도는 누군가의 생을 끊는 알리바이가 되고, 구원은 광기의 탈을 썼다. 가장 슬펐던 건, 그 안에 선한 의도가 분명 존재했음에도, 그것이 사랑의 방식이 아닌 파괴의 언어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윌라드가 그토록 믿음을 갈구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이를 잃고 만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믿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는가?” 단지 종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모든 가치와 신념, 그 뒤에 숨어 있는 자기기만과 불안함을 이야기한다. 믿음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지옥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진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믿음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2) 연결된 폭력의 서사
악은 죽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얼굴을 쓰고 다시 나타날 뿐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유는, 이 세계의 악이 끊기지 않고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전쟁이라는 큰 악은 가정이라는 작은 공간에 스며들고, 부모의 폭력은 자식의 방어 기제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자식은 또 다른 세계 속에서 악을 정의라 믿고 실천한다. 아빈이 그러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싸웠고,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악과 싸우게 되었다. 그건 단순히 ‘피는 못 속인다’는 운명론이 아니라, 더 깊고 복잡한 인간의 감정, 즉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되풀이하는 슬픈 구조를 말한다. 연쇄살인마 부부나 타락한 목사, 부패한 보안관도 모두 그들 나름의 논리를 지녔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악의 고리는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미궁이 되어간다. 영화는 그 미궁 속에서 단 한 사람, 아빈을 따라간다. 그는 그 길의 끝에서 ‘정의’를 이루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악을 자신의 피로 물들인 것일까?
느낀 점
끝까지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 그게 내가 건져 올린 유일한 희망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단지 등장인물들의 폭력이나 비극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야기가 너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주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조종하고, 정의라는 명분으로 또 다른 죄를 짓는 모습들이 어쩌면 내 주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빈은 그런 세상 속에서 자랐다. 그가 배우는 것은 말보다 먼저 주먹이었고, 기도보다 앞선 것은 침묵이었다. 아버지는 신을 향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지만 그 행동은 아들에게 죄의 피를 남겼다. 그런 아빈이 성장하면서 보여준 단단한 고요함, 말없이 행동하는 그 태도가 가끔은 한없이 어른스럽게, 또 때로는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아빈이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고, 누구도 배웅하지 않는 길 위에 혼자 선 그의 뒷모습.
그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잔혹했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은 죄를 목격했고, 그 죄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끝내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세상과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은 거창하지 않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누군가를 탓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이 영화는 그런 내 방식에 조용히 반문했다. ‘그들이 정말 악마였을까?’ ‘아니, 나는 얼마나 다를까?’ 누구든 상황과 믿음, 선택의 차이로 인해 괴물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괴물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건 참 슬픈 일이었고, 동시에 너무 솔직한 말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며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누구를 짓밟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묻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걸.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꾼 채 매일 나를 시험한다. 무심한 말 한 마디로, 침묵하는 순간으로, 혹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확신으로.
나는 그걸 알아챘고, 그래서 끝까지 사람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조용히 붙들었다. 그것 하나면, 내가 이 영화를 견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빈처럼 나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걷는 중이니까.